지난 글(산업혁명과 도시화 _ 아래 링크 참조)에 이어 이번시간에는 19세기에 나타난 이상도시와 프랑스 파리의 과밀화와 비위생적 도시의 개조와 관련한 내용으로 준비했습니다.
산업혁명과 도시화, 백투백 주택과 조례주택
지난 글에서 설명드린 '중세유럽의 도시유형과 도시의 변천과정'에 이어 산업혁명과 도시화에 대한 내용을 준비했습니다. 지난 글은 아래 링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2025.10.30 - [분류 전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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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이상도시
19세기에 나타난 이상도시 운동과 르네상스 시기의 이상도시 운동은 동일한 명칭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다른 사상적 기반 위에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도시계획 운동으로 볼 수 있다. 르네상스 시기의 이상도시 운동이 완벽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부 화가들의 회화적 조류로서, 실현된 경우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면, 산업혁명기의 이상도시 운동은 자본주의 체제를 바꾸기 위한 사회주의 운동의 일부로서 실제로 건설이 이루어졌다는 차이점이 있다.
19세기에는 자유방임주의가 자연질서로 이했됐고, 그 와중에서 노동착취와 노동자에 대한 탄압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에 대응하여 노동자와 사회주의자들의 저항이 이루어졌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사회주의는 단일한 대오가 아니라 대단히 많은 분파로 이루어져 있었다. 자본가에 대한 투쟁 못지않게 분파간의 투쟁 역시 매우 격렬했다. 그중 가장 유력한 세력이 마르크스주의자들로, 이들은 다른 분파들과 스스로를 구분하여 ‘과학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했다.
생시몽(Saint-Simon)과 영국의 성공한 면직물 사업가였던 로버트 오언(Robert Owen),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등으로 대표되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 분파 중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온건한 세력이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폭력혁명을 통해 자본주의 국가를 전복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떨쳐야 한다고 주장했다면,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자본가와 노동자의 평화적 공존을 주장했으며, 노동자들의 생활개선을 위한 온정적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개진했다. 그들은 계급적 차원의 대응과 투쟁보다 개인적 차원의 구제와 박애를 강조했다. 그 구체적인 수단으로서 착취와 억압이 없는 평등한 사람들의 공동체, 즉 이상도시가 건설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시되었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시도는 대부분 실패로 끝났는데, 그 이유는 대체로 인간을 너무 단순하게 이해했다는 것과 울타리 안에서의 좋은 환경을 만들면 좋은 세상과 인간이 만들어진다는 환경결정론의 관점으로 대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이들을 공상적 사회주의들이라 부른 것은 상당부분 일리가 있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시도는 순수했고 열정적이었다. 오언은 거듭되는 실패에도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곳을 찾아나서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언의 열정은 근데 도시계획의 아버지 에베네처 하워드(Ebenezer Howard)의 전원도시계획과 에버크롬비(Abercrombie)의 대런던계획(Greater London Plan)으로 연결되었다.
이들의 제안은 또한 대단한 비전을 담고 있었다. 푸리에의 팔랑스떼르는 고댕의 파밀리스떼르로 이어졌고 1920년대말 소련에서의 집합주택(Housing combine)계획을 거쳐 마침내 근대 건축의 영웅, 르 꼬르뷔제(Le Corbusier)의 위니떼 다비따시옹(Unit d’Habitation)으로 현실화 된다. 1952년 마르세이유에 최초로 건설된 위니떼 다비따시옹은 단순한 집합주택의 개념을 뛰어 넘어 하나의 건물에 일상생활의 기능을 집적시킨 수직도시로 평가된다. 위니떼 다시따시옹은 일, 주거, 여가의 기능을 한데 묶음으로써 현대 건축에 주상복합건물이라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결국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다양한 시도가 근, 현대 도시계획의 씨앗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스만의 파리개조
후발 선진국으로서 산업혁명을 경험했던 프랑스 역시 영국과 마찬가지로 심각한 도시문제를 경험했다. 영국과의 차이라고 한다면 중앙집권의 전통이 강한 프랑스는 영국과 달리 파리에 도시문제가 집중되었다는 것이다. 오스만(Hausmann)의 개조 이전에도 파리는 유럽을 대표하는 대도시였지만 19세기경에는 산업혁명과 인구유입으로 대단히 과밀하고 비위생적인 상태였다.
도시의 과밀화에도 불구하고 기반시설은 전근대적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제일 큰 길이 어른 걸음으로 여덟 발자국이었으며, 중심부만 돌로 포장이 된 채 나머지는 비포장 상태로 머물러 있었다. 당시 파리를 소개하는 관광책자는 파리를 ‘맑은 날엔 먼지, 비오는 날엔 진창’으로 소개하고 있다. 당시 파리는 하수도체계가 잘 갖추어져 있지 않아서 불결한 도시로도 유명했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콜레라가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콜레라로 인해 1832년과 1847년에 파리에서만 각각 2만명이 사망했다.
당시 관광책자는 악취를 ‘파리의 냄새’, 오물을 피해 걷은 걸음을 ‘프랑스식 워킹’이라고 유머러스하게 묘사하고 있다.
하수도 시스템의 부재와 함께 화장실의 부족 역시 상황을 악화시킨 요인이었다.
고대 로마시대의 인슐라 거주자들처럼 파리 시민들도 생활 오수를 건물 밖으로 쏟아 부었다. 당시 유행했던 여성들의 양산이나 하이힐이 아파트에서 쏟아져 내리는 오물을 피하기 위한 용도에서 도입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드레스와 구두를 더럽히고 싶지 않은 상류층에게 마차는 필수품이었다. 하지만 좁은 도로에 마차 통행이 늘어나면서 혼잡이 가중되었다.
19세기에 들어 파리인구는 폭발적인 증가를 거듭해서 후반기에는 그 수가 100만명에 도달하게 된다. 특히 1850~60년 사이에 60만명의 인구가 증가했다. 인구 유입에도 불구하고 주택공급은 한정되었으므로 집을 가진 사람은 전체 파리시민의 1/6에 불과했다. 이로 인해 런던과 유사하게 다수의 무허가 판잣집이 들어섰다.
나폴레옹 3세는 파리의 과밀화와 위생적 결함을 더 이상 방치해 둘 수 없다고 판단했다. 황제는 1853년 센(Seine)주 지사로 임명된 오스만에게 파리를 전면 개조할 것을 명령했다.



황제의 명령은 단순하고 분명했다. ‘도시를 보다 건강하게(More healthy), 덜 혼잡하게(less congested), 더 크게(More grand)’만들라는 것이었다. 황제의 명을 받은 오스만은 파리 개조를 위해 다음 네 개의 실행목표를 설정했다.
첫째, 바로크 양식의 미적 특성을 갖출 것. 둘째, 전염병을 야기하는 골목들을 체계적으로 정비하여 도시의 위생 상태를 개선할 것. 셋째, 밀집된 파리 시가지의 교통 혼잡을 개선할 것. 넷째, 주기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폭동진압을 용이하게 할 것. 모든 실행목표가 직간접적으로 도로의 폭을 넓히는 문제와 관련된 사항이었으므로, 오스만은 과밀한 도시에서 충분한 도로폭을 확보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오스만은 그 첫 번째 작업으로 파리 시청 지도과에 1/500 축적의 파리지도 142장을 제작하도록 지시하고 매년 변경사항을 반영시켰다. 이 지도에 건물소유자, 건물의 구조, 세입자수와 이름, 골목길의 위치 등을 표시했다. 이를 통해 길을 어디로 내고 새 건물을 어디에 지을지, 상하수도는 어디에 입지시킬지 등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사업은 1853~1869년 사이에 3단계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이 기간 중 파리는 거대한 건설현장이 되었다. 전체 66,578호의 건물 중 27,000호의 건물이 철거되어서 전체 파리 가옥의 3/7이 파괴되었다. 기존 건물이 철거된 자리와 새로이 파리로 편입된 지역에는 10만호의 건물이 새로 건설되었다. 이 과정에서 집을 잃은 35만명의 파리 시민이 이주를 해야 했고, 25,000명이 파리를 떠나야 했다. 파리 주변의 11개 코뮨(Commune)이 합병됨으로써 파리의 행정구는 12개에서 20개로 늘어났고, 이것이 현대 파리 행정구역의 토대를 이루게 된다.
오스만은 매우 저돌적인 이미지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토지수용방식은 대단히 신중했다. 나폴레옹 3세나 오스만 역시 사유재산권의 보장이라는 인식을 공유하는 ‘근대인’이었기 때문이다. 시당국은 토지 및 건물주와 장기간 협상을 진행했으며, 보상문제로 길 하나를 뚫는데 수년이 소요되었다. 행정절차와 보상을 마무리 짓는데 통상적으로 5~10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건설에 있어서는 저돌적으로 사업이 추진되었다. 도로, 상하수도 등 기반시설 공사가 불과 2~3년만에 마무리 되었다. 이는 농촌에서 유입된 수만명의 값싼 노동력 덕분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사를 진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사업기간의 대부분이 보상과 협상으로 소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스만의 개조를 통해 파리는 광장을 중심으로 사통팔달로 뚫린 방사형 가로체계와 일정한 층고로 도열한 바로크식 건물로 구성된 단일한 도시경관을 갖게 되었다.



황제와 오스만은 계획이 진행되는 동안 거의 매일 만났다고 한다. 자동차가 발명되기 이전의 계획이었지만, 오스만이 만든 광로(Boulevard)는 오늘날까지도 세계도시 파리의 차량흐름을 지탱하고 있다.
오스만은 매우 영리한 사업가였다. 17년 동안의 주지사 제임기간 중 11억 프랑의 예산으로 250억 프랑에 달하는 공사를 수행했는데, 그 비결은 민간에게 보상비와 기반시설 건설을 부담시키는 대신 개발권을 주는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오스만은 오늘날 민자유치의 선구자로 평가할 수 있다.
자본 투자자들은 앞 다투어 아파트, 백화점, 극장, 호텔을 건설했고 비용투자에도 불구하고 수십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오스만의 파리개조 사업은 자본가들에게 큰 이익을 제공하는 사업이었지만 집을 잃고 떠나야만 했던 서민들이 다수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파리는 이때부터 주거지 분화(Residential segregation)가 이루어졌는데, 오늘날까지도 북동부 지역은 저소득층이 밀집된 주거지역으로 남아 있다. 오스만의 파리개조는 많은 사람들을 절망케 했고 결국 1871년에 일어난 도시폭동인 파리 코뮨의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다음 글에서는 도시미화운동과 도시화에 따른 근대 도시계획의 두영웅에 대한 이야기로 고대도시부터 시작되었던 도시 이야기는 근현대 도시계획에 대한 내용으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구독!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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