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설명드린 '중세유럽의 도시유형과 도시의 변천과정'에 이어 산업혁명과 도시화에 대한 내용을 준비했습니다. 지난 글은 아래 링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2025.10.30 - [분류 전체보기] - 중세 유럽의 도시 유형과 변천 과정
중세 유럽의 도시 유형과 변천 과정
오늘은 지난 글에서 설명드린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도시에 이어 중세유럽의 도시유형과 도시의 변천과정을 준비했습니다. 지난 글은 아래 링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2025.10.28 - [분류 전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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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과 도시화
거시적 관점에서 인류는 지금까지 네 번의 큰 혁명을 경험했는데, 농업혁명에 이어 나타난 두 번째 혁명이 바로 18세기에 전개된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이다. 농업혁명으로 인류의 정주(定住)와 집주(集住)가 이루어졌다면, 산업혁명을 통해서는 도시화(Urbanization)가 이루어졌고 그에 따른 도시문제가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산업혁명을 계기로 도시는 비로소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모습의 도시로 탈바꿈했고, 도시문제의 대응으로서 근대적 기술인 도시계획이 등장하게 된다. 물론 그 이전시해에도 도시는 있었고 도시계획도 있었다고 할 수 있으나, 전근대(前近代)시기 도시는 도시문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을 갖지 않았고, 도시계획 역시 도시문제에 대한 대응이라기보다 단순한 상상 또는 건축의 확장에 불과했다.
우리는 통상 1769년 와트(J. Watt)의 증기기관 발명을 산업혁명의 시작으로 본다. 증기기관의 발명 이전에는 동력을 수력에 의존했기 때문에 대다수 공장이 물의 낙차를 이용하기 유리한 숲속에 위치했고 이로인해 도시화가 지연되었다. 공장의 규모 역시 제한적이었다. 증기기관이 발명되면서 석탄과 원료 수송에 유리하며 노동력의 확보가 용이한 지역이 찾아졌는데, 그것이 바로 도시이다. 도시로 자본과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이를 지원하기 위해 교통체계가 개선되면서 도시의 규모가 보다 커지는 누진적 순환인과 과정(Cumulative and circular causation)이 진행되었다.
흡인효과와 압출효과
도시화는 흡인효과(Pulling effect)와 압출효과(Push effect)에 의해 구성되는데, 도시에 고용원인 공장이 들어서면서 농촌으로부터 노동력을 빨아 당기는 흡인효과가 나타났다.
압출효과로는 인클로저운동(Enclosure Movement)을 지적할 수 있는데, 이 명칭은 지주들이 부가가치가 보다 높은 양을 키우기 위해 농경지로부터 농민들을 몰아내고, 소유권을 표시하기 위해 말뚝을 박았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농민들이 저항을 했으므로 지주들은 양을 풀어서 곡식을 먹어 치우도록 함으로써 농민들의 저항을 물리쳤다. 토마스 모어(Thomas More)는 그의 저서, ‘유토피아’에서 이러한 현상을 ‘양이 사람을 잡아 먹는다’고 풍자한바 있다.
마르크스(K, Marx)는 이를 통해 농노들이 이중적 의미의 자유를 얻었다고 설명하는데, 하나는 자유로운 신분을 획득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굶어 죽을 자유’를 획득했다는 것이다. 즉, 이전에는 사람들이 토지에 묶여(Bound) 있어서 자유는 없지만 생존은 보장된 반면, 이제는 돌봐줄 어떤 보호막도 없기 때문에 자신의 노동력을 팔지 않으면 안되는 자기 책임의 사회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지적처럼 농사지을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것 외에는 생존방법이 없었으므로 도시로, 도시로 향하게 된다. 또한, 농촌인구의 유입이 증가하면서 도시의 과밀화와 슬럼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졌다.
1800년 이전까지 영국은 농업 국가였다. 도시인구는 20%에 불과했다. 그러던 도시화율이 1851년 54%, 1892년 72%, 1911년 79%에 이르게 된다. 1801년부터 1911년까지 전체인구는 4배, 도시인구는 9.5배로 증가했으며, 1851년부터 1911년까지 전체인구는 2배, 도시인구는 3배로 증가했다. 1800년대 이전까지 인구 10만명 이상 도시는 런던 하나뿐이었는데, 1851년에는 모두 10개로 늘어났으며, 1911년에는 그 수가 36개가 도시가 되었다. 특히 대런던(Greater London)의 인구수는 1851년 240만명에 이른다.
백투백 주택
도시로 인구유입이 가속화되면서 노동력은 항상적인 과잉상태를 유지하게된다. 이로 인해 열악한 노동조건이 일상화 되었다.
열악한 노동조건과 함께 도시로 유입된 사람들을 괴롭힌 가장 큰 도시문제는 극도로 불량한 주거환경이었다. 쏟아져 들어오는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집이라고 할 수 없는 공간’에 사람들이 수용되었다. 노동자들을 기존 건물의 지하를 이용하는 지하주거(Cellar Dwelling), 간이숙소(Lodging house), 백투백(Back–to–Back)주택, 협소한 임대주택에 거주했다.
아일랜드인 등 사회 최하층 계급이 거주하는 지하주거는 햇빛이 들지 않았고 해충과 습기로 가득찬 전염병의 온상이었다. 아일랜드인들은 여기서 돼지를 키우며 함께 거주했다고 한다.
간이숙소에는 주로 젊은 노동자들이 임시로 많이 거주했는데, 남녀구분 없이 한방에 6~10명이 숙식을 같이 했다. 질병과 범죄, 매춘의 온상으로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었다.
셋집은 중산층이 교외로 떠나면서 남겨진 기존의 주택을 방별로 나누어 세를 놓은 것인데 1841년 한 조사에 따르면 주택당 40명이 거주한다는 보고도 있다. 용수와 화장실, 오물처리 등의 문제가 있었는데, 런던에서의 조사에 따르면 하나의 공동변소를 380명이 함께 사용했다는 기록도 보고된다. 백투백 주택은 전형적인 중하층 노동자의 공동주택인데, 두 채의 주택이 등을 마주해 붙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호당 평균면적이 13.5m2로 대단히 협소하고 과밀했다.
급수가 불가능했고, 단지 내 거주자들이 공동변소를 함께 사용했고, 주로 영세한 집장사에 의해 날림으로 지어져 공업도시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공업도시 리즈(Leads)의 경우 1886년 전체 주택의 71%가 백투백 주택이었다고 한다.

열악한 주택 자체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이들 열악한 주택이 매우 과밀하게 입지해 있어서 빈 땅이 거의 없이 건물이 들어차 있었다는 것이다. 상하수도 시설이 부재한 상태에서 좁은 도로에 오물과 쓰레기가 넘쳐났다. 15m2정도의 단칸방에 10여명이 거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초과밀 거주지의 경우 1m2의 단칸방에 한 가구가 사는 경우도 많았는데, 하나의 가구는 부부와 어린이, 조부모로 구성되어 있었다. 심지어 330m2의 주거지에 12,000명이 거주했다는 믿기 어려운 기록도 있다. 침대 하나에 4~6명이 예사로 쌓아 올려졌다.

여유가 되는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은 과밀과 하층계급을 피해 교외에 주거지를 마련했다. 생존의 근거인 노동조건 자체가 치명적으로 열악한데, 특별히 주거환경이 문제시 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자본가와 중산층들이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문제가 나타났다.
바로 전염병이다. 당시 유행했던 전염병은 대부분 수인성 전염병으로 식수가 오염되면서 나타났다.
런던의 하수구는 원래 우수용(雨水用)이었고, 분뇨는 따로 수거했는데, 인구가 급증하면서 수용능력을 초과했고 사람들은 분뇨를 아무렇게나 버리게 되었다. 시내 전체가 악취로 가득찼다. 특히 1830년 수세식 변기가 보급되면서 템즈강(Thames)은 그 자체로 분뇨통이 되어버렸다. 문제는 템즈 강물이 수돗물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관로를 이용하는 상수 공급가구가 1821년 전체가구의 2/3에 불과해서, 런던은 수돗물 오염에 대단히 취약한 구조를 갖고 있었다.

서민용 타운하우스, 조례주택
1848년 콜레라 발생으로 런던에서 14,789명이 사망했다.
1861년에는 알버트(Albert)왕자가 콜레라로 사망했다. 유아 사망률은 어느 해 일년 이상 생존하지 못한 유아의 비율을 의미하는데, 18세기초 런던의 유아사망률은 35%에 달했다.
이 수치를 오늘날 우리나라의 영유아 사망률 0.5%와 앙골라의 13%와 비교하면 얼마나 높은 비율인지 짐작할 수 있다. 1841년 영국인의 평균수명은 41세였는데, 공업도시 리버풀과 멘체스터의 평균수명은 24~26세였다. 대부분의 도시에서 사망자 수가 신생아 수보다 많았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과 같은 시대였다. 전염병 탓도 있지만 부실한 영양상태와 열악한 노동조건, 환경수준이 결합되어 나타난 결과였다.
1883년 스노(John Snow)가 콜레라의 원인을 규명할 때까지 콜레라는 악취로 전염된다는 인식이 보편적이었다. 죽음의 악취를 떨쳐버리고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시가를 피워댔다. 이제 과밀과 열악한 주거환경은 특정 계층만의 불운이 아니라 전체 사회의 생존이 달린 문제라는 인식이 지식인 사회에서 확산되었다.
1848년 채드윅(Chadwick)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정치인과 지식인들의 주도로 지방정부가 적정 수준의 위생시설과 배수시설을 설치할 것을 규정하는 공중위생법(Public Health Act)이 제정되었다. 1848년 법에서는 주로 상하수도 설비 확보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1875년 개정법에서는 건물의 구조와 재료, 화장실, 도로에 관한 사항으로까지 규제 범위가 확대되었다. 공중보건에 관한 사항이 주된 관심이었지만 보건환경의 개선을 위해서는 건조환경의 개선이 필수적이라는 인식을 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도시연구자들은 공중위생법을 근대 도시계획법의 모태로 평가한다.
공중위생법에 근거하여 영국에서는 20세기에 들어서기까지 주택규제와 개량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지하주거와 백투백 주택이 금지되었고 집장사들은 건축행위에 앞서 시 당국의 승인을 얻어야 했다. 19세기 후반에는 서민용 타운하우스인 '조례주택'이 대대적으로 건설되었다. 조례주택은 위생적 기준을 맞추는 것을 최우선으로 했기 때문에 질적으로 우수한 주택이라고 할 수 는 없지만 최소한의 생활기준을 충족했다는 점에서 큰 진전으로 평가할 수 있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개별 가구가 뒷마당에 독립적인 변소를 확보한 것을 조례주택이 이룬 획기적인 진보로 평가한다.
여기까지 산업혁명과 도시화 및 당시 주택의 유형을 알아봤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의 이상도시와 오스만의 파리개조' 대해 준비해서 다시 만나겠습니다. 구독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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